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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10. 22:24 - Bengi

와글 시민의회 대응에 대한 비판 : 나는 우리가 아니고, 우리는 내가 아닙니다.


정치 스타트업이라고 주장하는 와글이라는 곳에서, 박근핵닷컴을 만들고, 그 이후 좀 더 대담하게 시민의회라는 사이트를 만들어서, 시민들을 대표하는 (?) 시민 대표를 뽑아, 무능한 국회의원들을 대신하여 뭔가를 해보자라는 주장을 하였고,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한바탕 대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사실, 탄핵안 가결이 된 이 상황에서 시민 대표를 뽑을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민 대표라고 추천된 사람들이 이정희 전 국회의원이라던지 (...), 유병재 코미디언이라던지, 김어준 기자라던지 뭐랄까 그 "정말로 시민의 대표를 할 수 있는가?"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이 조차도 와글에서 골라낸 사람들이지, 넷티즌이 직접 추천을 하는 형식도 아니였죠. 뭐, 그러니까 완벽하게 자발적으로 추천과 투표가 가능했다면 그나마 말이 적었겠지만, 일단 와글에서 적합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필터링해서 뽑아낸 리스트에서 뽑은 사람들에게 투표를 하는 형태였고, 심지어 이 후보군에 속한 사람들은 사전 통보도 받지 않은 상태인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시민의회 사용설명서" 페이지에서 "시민대변인이 부담스러워요! 문의사항의 메일로 연락을 주시면, 시민대변인에서 지워드립니다."라는 말을 적어놨더라고요. 그리고, 이런 저런 항의가 들어오면 여러분이 직접 참여하면 된다고 대답을 하고 있는 와글 페이스북 페이지나, 우리와 나를 헷갈려하는 대표님 등... 뭐, 여러모로 총체적 난국인 거 같습니다만, 이 글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는 거 같고, 와글 공식 페이지와 대표님의 글이 계속 눈에 밟혀서 첨삭을 좀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별 영양가가 없는 글이긴 합니다. 솔직히, 주장과 근거는 별로 없고, "우리는"으로 시작해서 "우리는"으로 끝나는 글이고, 감정을 이입해서, 열심히 우리 플랫폼을 이용해달라는 의미로 작성했다는게 뻔히 보이는 그런 류죠. 다만, 몇몇 인과 관계의 오류나 잘못된 근거, 단어의 오용 같은 거에 집중을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토요일에 광화문에서 약속을 잡고, 집회에서 차벽에 스티커를 붙이고, 창문에 박근혜 퇴진 플랜카드를 걸고, 나라를 위해 주말을 반납하고, 청문회를 보며 화가 나고, 처음으로 시국 선언에 참여하고, 1시간 동안 머리를 했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젓고, 안 보던 뉴스를 밤마다 챙겨보고, 우리를 대표한다는 국회가 우리의 뜻을 대표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별로 할 말은 없지만, 뭐 여기에 첨언을 하고 싶은건 처음으로 시국 선언에 참여하지도, 뉴스를 안 보지도 않았다는 걸 태클 걸고 싶네요.


우리는 직장인이고, 우리는 학생이고, 우리는 주방 노동자이고, 우리는 목수이고, 우리는 바리스타이며, 우리는 작가이고, 우리는 교사이자, 우리는 사회복지사이고, 우리는 문화기획자이며, 우리는 자영업자이고, 우리는 직접 우리를 대표하는 시민 의회를 만들자고 제안한 1,141인이자, 손에 입김을 불며 광장에 나선 230만명이고, 더 나은 이 곳을 바라는 5000만명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우리는 (명사)이고, 우리는 (명사)이고, 우리는 (명사)이고.... 를 반복하다 갑자기 "우리는 직접 우리를 대표하는 시민 의회를 만들고자고 제안한 1,141인"과 "광장에 나선 230만명"과 "더 나은 이 곳을 바라는 5000만명"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뭐, 시적 허용 정도로 생각하면, 상당히 아름다울 구문 일 수 있으나, 1,141명과 230만명과 5000만명이 똑같은 사람은 아니지 않나 싶기도하고 뭐 그렇습니다.


그러나 국회는 어떠했나요? 우리의 뜻을 대변하기 위해 우리의 표로 당선된 국회가 우리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고 있나요? 국회가 우리를 위한 법을 만들고, 우리를 위해 예산을 집행하며,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나요? 230만명이 거리에 나와 우리의 뜻을 직접 전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박근혜 퇴진, 그리고 박근혜 게이트 관련자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와 처벌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요구에도 충분히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기 위해서 앞에서 상당히 큰 무리수를 뒀다는 걸 첫 대목부터 알아볼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 (실제로는 와글) 입장에서 국회를 공격함으로써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뭐, 국회에서 계속 법이 통과되고 있고, 성역 없는 수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예산을 매년 집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왜곡하는 건 둘째치고 말입니다.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합니다.


또다른 재미있는 포인트입니다. 뭐 간단한게 해석하면, "숟가락 얹기 좋아보입니다. 그래서 와글이 합니다." 정도로 봐야하지 않을 까 하는데, 대표적인 범주 착오 오류입니다. 우리를 재정의하고, 중간에 (전혀 그렇게 교묘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바뀐 의미를 넣는거죠. 여기서의 우리는 분명히 "와글"입니다. 그리고, 이 이전의 우리는 정의되지 않은 그 무언가죠. 1141명인지, 학생인지, 230명인지, 자영업자인지, 5000만명인지 모르겠는 그런 우리 말입니다.


국회가 하지 않으니, 우리가 직접 의회를 만들어 우리의 뜻을 전하려 합니다. 박근혜 게이트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와,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직접 논의하고자 합니다. 방송인 김제동, 작가 김훈,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을 비롯해 목수 최봉수, 바리스타 김경준, 주방 노동자 최병집 등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무려 1,141인이 시민들이 직접 시민의회를 만들자는 이 제안에 동참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와글에서는 온라인 시민의회 플랫폼 (http://www.citizenassembly.net)을 개설했습니다.


사실, 이것도 의문이 드는 것이, 1,141명이 동참하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사이트 내 후보로 올라온 사람의 숫자는 그보다 적다는 겁니다. 사실 1,141인이 어디서 온 숫자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온라인 시민의회 사이트는 시민들이 직접 시민 대표를 추천하고, 또 시민 대표 선출을 위해 투표할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또한, 시민대표를 어떻게 선출할 것인지, 누구를 뽑아야 마땅한지, 구성된 시민 의회의 운영 원칙과 역할은 어떠해야 할지 누구나 토론방에서 토론 과정에 참여하여 결정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 플랫폼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우리가 결정하고자 고민하는 ‘숙의 민주주의’의 장으로서 기능할 것입니다.


또다른 문제가 있는데, 시민 대표를 선출하는데, 직접 민주주의 플랫폼이라고 하는 건 상당히 어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대표를 뽑는 행위 자체가 대의 민주정치를 한다는 의미에 가깝지 않나합니다. 거기다, 지금의 "우리"는 단순히 국회의원만 뽑는 것이 아닌, 시위나 집회도 하고, (뭐 일단은) 자유롭에 이미 인터넷을 통해서나, 대자보를 붙이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의견을 표출하고, 의견을 수렴해왔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부분들을 다시 재발견하고, 새롭게 제공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기존의 것들과 와글의 대안을 비교를 하는데, 솔직히 와글이 제시하는 건 기존의 모델과 하등의 차이가 없습니다.


현재 온라인 시민의회 사이트에서는 우리들의 뜻을 전달할 시민 대표를 추천 받고 있으며, 현재 추천을 통해서 21명의 시민 대표 후보가 올라와 있습니다. 시민 대표 후보에는 지난달 5일 집회에서 “저를 위해 피땀 흘리며 일하지만 사회로부터 개돼지, 흙수저로 취급받으며 사는 부모님”에 “더 나은 내일과 미래를 주기 위해” 무언가 해야만 해서 나왔다며 자유발언대에 올라 화제가 된 대구 송정여고 2학년 조성혜 후보, 창업한 회사가 커지면서 직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는 개발자이자 경영인인 송재경 후보, 기생충이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기생충학을 전공했다는 서민 후보 등이 등재되어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민의회 대표단은 오는 16일까지 후보 추천을 받고, 19일에 구성될 예정입니다.


이 부분도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16일까지 추천을 받고, 19일에 구성될 예정입니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동의한 적이 없을 텐데 말이죠. 모든 건 와글이 결정하는거지, 시민이나 넷티즌이 결정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죠. -_-a


여러분의 참여를 통해 선출된 온라인 시민의회 대표단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수렴된 우리의 이야기를 청와대와 정치권, 사법부, 언론기관에 전달하고, 압박할 예정입니다. 이 시민 대표가 누가 되느냐, 전달할 우리의 뜻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뜻의 전달과 정치권에 압박은 어떻게 할 것이냐, 이는 모두 참여하는 우리, 이 글을 보는 당신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는 모두 참여하는 우리, 당신의 손에 달려있습니다."라는 말이 아주 의미심장해요. "참여 안 하면 우리가 아니다, 너네다"라는 걸로 읽힐 수도 있고, "당신이 참여 안해서 망하면 당신 탓이야"라는 걸 암시하기도하고, 상당히 저열한 수사일 것입니다. 거기다가, 압박을 가할 예정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를 하지 않았죠.


이야기 하는 우리, 실세가 됩니다.

우리, 우리의 손으로 나라를 바꿉니다.


사실 이 부분은 이미 광화문 광장에 나온 사람부터 방송국, 언론인까지 이미 하고 있는 거죠. 와글이 새롭게하는 건 아닐겁니다. :P



이제 이진순 와글 대표의 글로 넘어가봅시다. 사실 와글 페이스북 페이지 글처럼 전체를 다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고, 부분부분 중요하다고 생각한 곳만 발췌해와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본의가 왜곡되지 않게끔 일부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본래 문제의식을 충실히 전달하도록 표현을 수정하겠습니다. 동시에 근거없는 비방과 음해엔 단호하게 대처하겠습니다.


문제가 될 부분을 삭제한다. 우리를 공격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공격을 할 것이다. : 전형적인 기업의 고자세적인 대처죠. 


제안문에서도 강조되었듯이, 시민대표의 역할은 온라인으로 수렴된 민의를 충실히 전달하는 시민배달부, 대변인의 역할일 뿐입니다. 무보수의 자원봉사자이고 어떤 특권이나 지휘권도 없는 시한부 대변인이라고요. 그걸 돌아가면서 할 수도 있고 추첨으로 할 수도 있고 추천이나 추대로 할 수도 있으니 어떤 방법이 좋을까 하는 점은 지금도 온라인상에서 공개적으로 토론되고 있습니다. 가장 합리적인 의견으로 합의해 나가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성찰과 토론에 입각한 숙의적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촛불집회에서 보여준 우리 국민의 저력을 제대로 응축하고 키워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누구나 마이크 잡고, 블로그에 글 쓰고 그러면 누군가는 봐주겠죠. 거기다, 무보수의 자원봉사자이고, 특권이나 지휘권도 없는 시한부 대변인이라고 하는 건 상당히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이미 추천 리스트에 뜬 사람들은 대부분 권력이나 인지도나 여하튼 사회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자신의 발언권을 통해 무언가를 관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단순한, 일개 시민이 아니라요. 거기다, 그것을 종합적으로 제어하고 있는 플랫폼을 만든 와글도 동일하죠. 만약에 그 사람들이 시한부 대변인 일지라도, 게시판의 관리 권한을 갖고 있는, 의견을 삭제할 수도, 사용자를 차단시킬 수도 있는 와글이라는 스타트업이 있다는 이야기를 빼 놓는건 또다른 문제입니다.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국민대표들 때문에 시민대표라는 표현에 부담을 가지시는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다면 원래 제안문에 담긴 본뜻대로 시민대변인 혹은 시민총무 들처럼 다른 표현을 쓸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이런 시민대변인이 각 단위별로 지역별로 한 3000-4000명쯤 되서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시민평의회 같은 조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역시 개인의견일 뿐이어서 그에 관한 논의는 시민의회 토론방에서 결정되겠지요마는.


사실, 이 문제는 "커뮤니티 운영자가 커뮤니티 활동에 참여해도 되는가...?"라는 꽤 예전부터 이어져왔던 질문과 일맥상통하는 느낌입니다. 아니 뭐, 그래요 좋은 커뮤니티이고, 관리자가 적절히 행동하면 뭐 잘 굴러가겠지만, 관리자 멋대로 운영되다 박살난 커뮤니티가 한 두 개인가요? 개인 의견, 토론방 이런 좋은 미사여구 이전에 이미 관리자한테 기울어진 판이라는 걸 잊으면 안되겠죠.


재삼 강조하고 싶은 건, 온라인시민의회는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민의를 수렴하고 그뜻을 정치권과 특검에 전달하기 위한 시민공론장입니다. 너희가 뭔데 그러냐고요? 우린 그냥 평범한 시민들입니다. 그걸로 부족합니까? 온라인으로 민의를 모아보자고 하는 걸 잘못이라고 하신다면, 그 잘못 계속 하겠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너희가 뭔데 그러냐고요? 우린 그냥 평범한 시민들입니다."라고 하셨는데, 아뇨아뇨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어떤 사업을 하시려고 계시는 한 스타트업의 대표 정도로 보셔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평범한 시민" 이런 레토릭은 너무 진부하지 않나 싶습니다. 냉정하게, 평범한 시민이라면, 정치 스타트업을 운영하지도, 이런 사이트를 만들지도, 그리고 공론장을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겠죠. 정확히 말하자면, 민주정 내에서는 뭐 사이트도 만들고 그럴 수는 있습니다만,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회피책으로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라고 하는건 상당히 큰 문제일 것입니다. 분명히 자신의 스타트업이 하는 -비영리일지도 모르지만- 사업이고, 분명히 BM 같은 건 어딘가 존재하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부수적인 광고나 지원을 명목으로 기부를 받거나, 아님 뭐 여러 방법이 존재하겠죠. 그 상황에서, 갑자기 와글과 시민의회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대응하는 사람이 동등한 위치와 이해관계에 있다고 하는 건 상당히 잘못된 표현일 것입니다.


제 느낌, 아니 일단 "정치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쓴 것부터 재미있습니다만, 스타트업은 망하려고 만드는게 아닙니다. 끝까지 살아남고, 그 과정이 엄청나게 험난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유의미한 수익구조를 만들어내서, 성장을 할 수 있는 기로를 찾아내는거죠. 근데, 비영리나, NGO 같은 게 아닌 "정치 스타트업"을 한다고 했으니, "과연 이 목적이 정말 순수한 의도나 민주주의적 공론장을 만들기 위해서 일까?"라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또한, 와글이 취해온 지속적인 행동들은 전형적인 바이럴 마케팅에 속해 보이고, 소비자 대응은 전형적인 실패하는 기업의 그것과 곂쳐져서 보이네요.


덧) 도대체 의견 달 수 있다는 게시판이 어디있나 했더니, 자사 SNS 서비스인 "빠티"에 http://citizensassembly.parti.xyz/ 라는 주소로 만들어 놨군요. 너무 속보이는거 아닌가 싶기도하고...

덧2) .xyz 도메인이 1년 99엔도 안하죠. 하하 ㅠㅠ

덧3) 시민의원 투표에서 IP 기반 필터링을 하는거 같은데, 이러면 중복 투표가 가능하지 말입니다.


  1. 부탁드려요 2017.05.11 11:17

    안녕하세요 글잘보았습니다
    이번에 블로그를 처음 만들어보고자 하는 초짜입니다.
    네이버같은 메이져 블로그를 사용하는데 거리낌을 좀 가지고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의 공간, 폐쇄적인 곳을 찾고 있습니다.
    티스토리가 적당한 곳임을 느껴서 초대장을 받을 곳을 찾고 있습니다.

    저는 주로 운동 , 컴퓨터 게임에 대한 블로그를 작성하고자 합니다.
    때로는 해외 여행을 다닐때 해외 축구 직관에 대한 내용을 적어 놓는데요.
    공유할수 있는 글을 적고자 합니다.
    초대장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owerk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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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17. 21:07 - Bengi

성냥 한 개비

오랜만에 글을 쓸 때, 손 끝에 느껴지는 감각은 연필의 흑연이 부스러지는 느낌도, 볼펜의 볼이 굴러가는 느낌도, 만년필의 촉이 사각거리는 느낌도 아니다. 무미건조한, 타닥거림 속에서 노트북 액정에 글자들을 나타내게하는 자판의, 정확히 말하면 스프링의 장력과 PCB 키보드의 감촉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글이란 퇴고의 과정 없이 술술 쓰는 생각의 정수라 생각을 하였지만, 요 근래 도통 생각이란 걸 해본적이 없으니 정수를 쏟아낼 일도 없을 뿐더러, 화면 속의 글자들을 자꾸 지워나가고 다시 쓰고 그리고 다음에 어떤 단어를 놓을지에 대해 계속 고심하는 퍼즐 맞추기에 가까우리라. 잘못된 피스 하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 모가 나가는 일들을 반복하다보면, 거기서 거기로 보이는 단어들이 왜 글을 쓸 때에는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해보지만, 어쩌랴, 다시 다른 조각을 그 위치에 맞추려고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을. 이런 식으로 수 백 개의 조각들을 맞추어 간신히 만들어낸 한 편의 글은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다. 아마, 300 피스 퍼즐이 2000 피스 퍼즐보다 웅장함도, 아름다움도, 성취감도 덜 하리라는 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주어진 그림을 다시 맞추어나가는 고된 일을 하면서, 예전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회상하기는 커녕, 기억의 편린들이 점점 증오스러워져가는 걸 겪게된다. 그런 기억들이 한 때 지식을 살찌워갔던 것이라면, 이제는 버려야할 것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수사의 규칙이라던지, 우아한 단어의 선택이라던지, 시의적절한 주제의 배치라던지, 거슬림 없는 흐름이라던지 이런 것들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것들은 불필요한 것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언어의 다채로움은 축소되고, 단순한 논리 관계에 속박되어버린, 칙칙하고, 어둡고, 그리고 성냥곽처럼 작은 실용적인 무언가를 쫒기만 하는 것이다. 단순함이여, 그것이 설령 미를, 유창함을 빼앗을지라도, 나는 그것의 드라이함에 매료되어 그것을 추구하리라. 자판 위에 놀아나는 손가락의 경쾌한 리듬을 줄이고, 최소한의 소리만으로 글을 완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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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8. 23:12 - Bengi

같잖다는 것

옛날 옛적에, 논술 학원을 다녔을 때 학원 선생"님"은 내가 쓴 글을 모두 기록을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의 중요성을 요즘 들어서 많이 체감하는 중이다. 내 옛날의 생각들이 어떠했는지, 나는 예전에 비해서 발전을 했는지 퇴보를 했는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준으로써 써왔던 글 만큼 소중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보면 낯간지러운 글이나, 그렇게 아름답지 못한 논리전개로 무장한 글들을 볼 때마다, 내가 그 당시에 누구의 문체에 영향을 받고, 어떤 사상에 경도되어있었는지에 대해 다시 되새김질을 할 수 있었고, 그리고 그 글로부터 다시 나를 조각해 낼 수 있었다.


과거의 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했으며, 타인의 주장이 아무리 터무니 없더라도 그에 대한 반박을 성실히 해왔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낙으로 삼았는지 의무로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예의라는 게 존재하고 절차라는 게 존재하던 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과연 그런지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


한 사람이 있다. 저격을 하기 위해 글을 쓰는게 아니라서 간단하게 언급을 하자면, 그는 주장이 과격하다. 그 과격한 주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무지함에서 기인할 터인데,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많은 단정적인 말들과 정언 명령으로 가득한 그의 글은 어느 순간 반박의 대상이 되고, 좋지못한 선례로 남겨지게 된다. 그리고, 그 무지의 소산은 언제나 동일하게 반복이 된다.


그의 글 중 내 이목, 아니 내 심장을 고동치게 했던 글이 하나 있었다. 같잖다는 단어를 쓴 것이였다. 같잖다.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타인의 주장을 볼 때마다 같잖음이 느껴진다고 표현한 그 글을 봤을 때, 나는 "반례가 존재하지 않는 명제는 명제로써의 가치가 있는가"로 논의를 했던 수 많은 -아니 많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결론이 나 있음으로- 철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듯한 느낌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주장이 가치 없다고 느끼면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된 생각일까라는 걸 잠시 한 결과, 나 자신도 그런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직까지 간신히 남아있는 인격과 예절이라는 것 속에서 그것을 바로 드러내지 못할 뿐.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봐 왔고, 그것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국한되어 있는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인터넷에 모이며, 실제로는 현실에는 그런 사람들이 극소수라는- 믿음을 고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대학과 사회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부터 처절하게 무너져갔고, 내 사람을 대하는 시각은 점점 비틀어져가는 것 같았다. 아니, 내 정신조차도 비틀어져간다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같잖다는 것. 타인이 타인을 같잖게 본다는 것을 인지할 때마다, 내 자신의 고결함만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방관자로 남아 묵언수행을 해야할지, 아님 그들에게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할지, 아님 내 가치관을 그들과 동화시켜야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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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25. 23:04 - Bengi

적성이 있다는 것

매번 내가 컴퓨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적성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나는 방황을 하고 있는데, 너는 적성이 있어서 좋겠다." "컴퓨터 하나만 바라보고 사니 그것이 얼마나 편할까?"라는 이야기는 같은 컴퓨터공학과 친구들이 아닌 다른 -특히 경영대나 사회계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맞딱드리게 된다. 아마  그래 학벌주의의 영향으로 대학을 맞춰 들어갔거나 취직 잘 된다고 경영대 들어간 사람들의 성토가 이런식으로 나오려니 하지만, 그래도 이런 글을 적게 되는 건 사실 남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딴판인 경우들이 많다는 걸 좀 확실히 해두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경영학을 부전공으로, 어쩌다보니 행정학을 (아마 2학기 때 정책학으로 바꾸겠지만) 복수전공으로 뛰고 있다. 그리고, 사실 적성이 있는 컴퓨터 쪽은 이미 흥미가 떨어진 상태이고, 내가 뭘 더 공부해야할지에 대해서도 아직도 고민 중이고, 더 나아가서 어디 랩으로 가야할지, 뭘 논문 주제로 삼아야할지에 대한 고민들은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상태이다. 사실, 적성이 맞는 것이랑 미래 준비를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건 180도 다른 일이고, 적성이 맞는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깡통을 차는 일에 적성이 맞는다면 이 한국이란 나라에선 편의점에서 일하는게 더 효율이 좋은데, -경영학을 택한 분들과 같이- 나도 어쨌든 내 밥그릇 생각하면서 진로를 택할 수 밖에 없다.


뭔가 배부른 소리라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적성이 있는 것과 내가 행복하게 그것을 하는 것과는 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고, 존경이나 시샘의 눈빛으로 보는 무언가는 꽤 많은 시간의 투자와 노력을 통해서 나온 결과라는 걸 알았을 때야 비소로 변하겠지. 그렇다고. 다들 뭐 그렇게 사는데, 뭐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있겠는가. 남들도 다 열심히 할텐데. 뭐 거기다, 몇몇 부분은 10년전 지식으로 돌아가는 내 뇌도 슬슬 업데이트를 해야하고, 리눅스도 좀 제대로 써야하고, 바뀐 것들을 다시 배워야하는 입장에 있는 이 시점에 적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수록 뭔가 씁쓸한 느낌이 든다.


사실 난 내가 어디에 적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해 왔으니 지금도 컴퓨터 앞에 서 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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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11. 19:57 - Bengi

죽음을 기억하는 법

그것을 발견하게 된 것은 어느 때와 다름 없이 페이스북 어플리케이션을 열고, 아무 생각 없이 타임라인을 훑고 있었을 때였다. 평온한 일상, 일, 프로젝트, 졸업, 입학 등이 어우러진 그 글들의 연속 속에서 뭔가, 이상한, 분명히 흑백으로 올라오면 안되는 사진 한장이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떴을 때 나는 그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을 억눌러야 했었다. 분명히 이 흑백 사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페이스북에 올라왔는지를 이미 본능은 알아차렸지만, 내 이성은 그것을 아직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 사진을 터치하였고, 그 사진에 달린 글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 정도로 아마도 연락을 최소 6년 이상, 아니 같은 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지 못한 한 사람의 죽음은 그렇게 나에게 와닿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 아니 그 전에 도대체 왜 죽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죽음을 꾸역꾸역 애도하는 글들의 연속을 볼 때마다 나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내가 아니 몇 년전만해도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이런식으로 애도를 표현했는가. 부고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그것이 또 뉴스피드에 계속 올라오는 것이 정상적이었는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자의 사진이 타임라인에 매번 올라올 때마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죽은 자의 일상과 프로필 사진들에 좋아요가 찍혀졌고, 그리고 1년전... 2년전... 그리고 수 년 전 사진들이 그렇게 다시 타임라인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각자 충분히 준비했던 애도와 회한과 그리고 통한의 글들은 사자의 담벼락을 채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원하건 원하지 않건 타임라인 속에서 무덤덤하게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였다.


페이스북은 세상을 바꾸었다. 페이스북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이집트의 사례를 보듯이 SNS는 우리의 삶의 양태를 바꾸어놓았다. 인류 역사상 제일 빠르게 정보가 공유되고,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 가깝게 와닿는 시기는 아마도 지금일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이 연결되어있고, 이러한 연결고리를 끊을 수 없는 시대는 아마 페이스북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사실, 나는 이러한 방시의 추모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장례식장에서 가족들과 친한 친구들이 모여서,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좋은 곳에 갔으리라는 말로 이야기를 마쳤을 것이다. 아마도 페이스북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것의 확장판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표현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떄문에.


사자의 페이스북은 더 이상 업데이트 되지 않지만, 담벼락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추모의 글을 써주고, 과거의 기억들을 공유한다. 그런 작은 울림들은 한 사람의 죽음을 기리는데는 정말 적당한 방법일 것이다.





1년 전, 꽤 가까웠던 친구가 죽었을 때, 나는 트위터에서 그 소식을 접했고, 트위터와 장례식장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추모를 하였다. 하필이면, 축제 기간이자 중간고사 기간이었던 그 때, 나는 학과 주점에서 술을 미친듯이 쳐 마시고는 미친 듯이 울었다. 정작, 장례식장에서는 눈물을 하나도 흘리지 못했던 나는 그것이 진짜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비로소 울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버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가끔, 문득 마음 속에서 그 친구가 생각나는 떄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트위터에서 그 친구의 계정을 들어가본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비루한, 슬픈, 그리고 나 혼자 챙기기 힘든 현실로.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거 같다. 다만, 공간이라는 요소가 점점 희미해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좋은 곳에 갔기를. 명복을 빈다. 나라도 남아서 세상을 좀 더 좋게 바꾸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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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26. 03:08 - Bengi

무제

재수학원 시절, 지금은 그렇게까지 연락이 잘 되지는 않지만, 친구 하나를 사귀었었다. 그리고, 꽤 진솔한 대화들을 나눌 기회를 가졌었는데, 그 이야기 중 하나가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을 두는 그런 한 사람"에 대한 것이였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까짓 외로움 하나 덕분에 그런 큰 노고를 들일 필요가 있는가"와 "도대체 왜 그런 행위를 하는가"가를 중점적으로 생각을 했었다. 아마, 그 당시의 나는 외로움에 익숙했었던 면도 있었겠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행위 자체를 이해를 못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들을 했었던 것 같다.


사실 요 근래 고립감을 많이 느낀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이런 고립감은 금방 해소되지만, 아마 이런 지속적인 고립감은 내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강박관념에서 기인하는 것이 분명하다. 과거의 일들이나 아니 과거의 일들이라기보다는 현재진행형에 가까운 것들이 나의 목을 서서히 졸라가면서, 여러 강박 관념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사실 이런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런 상황은 지속 되리라고 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해결 자체가 불가능한 문제에 나는 마딱드리고 있는 상태이다.


아니, 뭐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쓸까말까 고민을 하지만, 그래 계속 쓰기로 결심을 했으니 끝을 보자. 사실, 이런 생각은 아마 과거의 경험에서 누적된 결론일 것이다. 실제로 별로 안정적이지 못했던 상황들 속에서 내가 택했던 것은 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였으며, 이는 지속적인 불안정한 상황에 대한 가정과 그 해결책을 찾아가는 일의 연속이었다. 대부분 시도와 실패, 혹은 가끔의 성공 속에서 꽤 많은 경험들을 하였고, 이는 일종의 편견이나 확증편향을 세우는데 일조를 하였다. 사람이 제 정신인 이상, 모든 일들을 새롭게 받아들이며 분류화를 시키지 못한채 "저것은 다리가 네 개 발리고 쿠션이 있고, 등받이가 있는 물건인데, 색상은 적갈색이고, 광택이 보이는군!" (보통 미용실 의자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이라고 하겠는가. 많은 경험은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보는 기조적인 틀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였을 것이고, 나는 그 틀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어렸을 적에는 왜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틀에 박혀있는, 꽉 막힌 사고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기 못했었다. 아니 의자는 맞는데 그 의자의 특징에 대한 제대로된 고찰이나, 다른 의자와의 차이점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조소를 날렸다는 것이 더 정확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어른이 되었고, 틀에 박혀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많은 생각은 많은 고통을 가지고 온다. 사물의 잘못된 점이나 사람의 잘못된 점을 찾아낼 수록, 사람의 정신은 지치기 마련이다. 왜 사회가 이 모양인가, 왜 저 사람은 저런식으로 밖에 행동을 못하는가, 뭐 이런 문제들은 깔끔하게 해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전체적인 사회 기조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야하므로 (실제로, 이런 비판이 수용되지 않는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 헬조선이여!) 경렬한 저항을 이겨내야하는 과정도 거치게 된다. 결과적으로 나는 사회화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생각을 안 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다.


술... 술은 고대부터 이어져온 몇 안되는 뇌를 마비시키는, 쾌락을 가져다주는 몇 안되는 약물일 것이다. 가끔가다 술을 마시면서, 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다행히도 사회화라던지 편견이라던지 꽉 막힌 생각이라던지도 같이 잊혀져버린다. 꽁꽁 닫았던 문은 용기라는 감정에 의해 열리고, 나의 생각을 뿜어 낼 떄가 있다. LSD를 하던 젊은 시절의 잡스도 이랬을까. 잘 모르겠다만, 여튼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아마, 내가 술을 마시고 4시간전의 술을 안 마신 꽉 막힌 나를 비판하는 감정이 용솟음쳤기 떄문일 것이다.


감정에 충실해지고, 나 자신의 용기를 갖게 되는 유일한 길은 이런 의존성 약물, 알콜이나 니코틴 밖에 없는것일까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의지만으로 해결 될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점점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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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19. 14:30 - Bengi

적응 한다는 것

트위터를 유심히 살펴보거나 페이스북에 친구가 맺어져있을 정도로 친한 분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요즘 나는 일을 하고 있다. 일이라기 보다는 소규모 프로젝트를 한다고 하는게 더 맞겠지만, 여튼 이 덕분에 학교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고 열심히 장비 분해하고, 각종 통신 프로토콜을 분석하는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정리 정돈하는 일들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프로젝트 매니저(PM)의 역량이 떨어지거나, 각 팀원들의 역할들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을 때 주제가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프로젝트는 침돌하게 되어있다. 정리 안 된 일정이나, 정량화 안 된 일들은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도대체 삽으로 땅을 파고 있는 건지, 하늘에 삽을 휘두르는 건지도 모를 때, 지금 땅을 파야할 때인지 주춧돌을 쌓아야할 때인지 모르는 이런 상황들이 연속되면 산출물이 나올리가 있나! 그렇게 서서히 침몰해가는 프로젝트를 보면서,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할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근 한달간 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왔으니, 뭐 여기서 더 할 말이 무엇이 있는가?"란 질문을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할 말은 없다. 나도 이런 정체되어있는 상황에 적응하고 일 얼마나 빼먹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요 근래 환경이 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값진 경험을 하는 것 같다. 예전의 나라면, 내 일이건 아니건 중요하다 싶으면 다 해놨고, 남이 하는 일들을 주기적으로 체크하고 거기에 맞춰주려는 노력을 엄청나게 했었는데,요즘은 그걸 해야할 이유를 모르겠다. 하면 할 수록 스트레스만 쌓이니 방어적으로 변하기만 한다.


언젠간, 언젠간 정말 기쁜 마음으로 모든 걸 바쳐 일을 해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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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5. 23:47 - Bengi

닭은 도망가기만 하였고, 사람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건 아니지만, 뭐 그래 예전에, 그것도 꽤 어렸을 적에 교회 설교였던가, 학교에서 지루한 수업 중간이었던가 목사인지 교사인지 누구인지는 생각이 잘 안나지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이유는 인간은 상황을 바꾸기 때문이라는 것” 닭은 멍청해서, 자기 주변에 포식자가 나타나면 미친 듯이 도망치지만, 한 마리의 닭이 포시자의 입에 물려 어디론가 끌려가면 나머지 닭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 닭은 멍청하기 때문에 포식자를 몰아내려는 행위도, 자기를 방어하려는 미래의 대비도 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가? 미래를 대비하고, 포식자를 내쫒을 무기를 만들고 방벽을 세우고, 그리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사소한 차이가 인간과 닭의 미래를 이렇게 갈라버렸으며, “인간이 숭고한 이유는 미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있기 때문”이라는 그 말씀은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서 꿈틀대고 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과연 닭은 멍청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했는가, 그 전에 과연 그런 행위를 닭이 정말 하는 것인가, 닭이 멍청하다고 해도 대부분의 동물이 갖고 있는 방어 본능이 존재하지 않을리가 없는가 등등 이런 저런 생각을 기나긴 인간 찬가를 들으면서 했었고, 그 당시에는 이런식의 비유가 옳은가에 대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요즘 문득 드는 생각이 인간도 별로 닭과 다를바가 없다는 느낌이다. 아니 이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든 예시 속에서 인간의 비루함을 깨달았다고 해야할까.


닭은 과연 미래라는 개념이 없어서, 용기가 없어서, 그런걸 생각할 뇌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을 했을까?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에게 쫒기는 얼룩말 떼는 한 마리의 얼룩말이 희생양이 되자 뛰는 것을 멈춘다. 희생으로써 얼룩말 떼는 다시 안위를 찾았고, 얼룩말들은 다시 평온한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외부 위협은 언제나 존재하고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아마도 그 체제에 익숙해지는 것이 답일 것이다. 얼룩말이나 닭 모두 그런식으로 살아왔고 그것은 하나의 정해진 틀이었을 것이다. 저항할 수 없었기에, 아니 하나만 희생하면 모든 것이 다 제대로 돌아갔기에 그랬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닭과 별로 다른 행동 패턴을 갖고 있지 않다. 닭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지 못한다. 사실 포식자라고 하기에도 뭐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미친듯이 도망칠 수는 있지만, 설교처럼 자기 자신을 지켜낼 방도를 찾아내지는 못한다. 정리 해고, 기나긴 노동시간, 낮은 임금, 사회적 불안, 높은 자살율, 차별… 이런것들은 없어지지도 않았으며, 점점 더 사회 문제로 화두 되고 있다. 이런 문제를 마딱드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안위만 생각할 뿐, 자신 주변을 둘러보지도 못한다. 사람, 닭, 얼룩말 모두 자신의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인간은 정말로 동물과 다른 지성의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가 존재했었다. 동물과는 다른 면이 있다기 보다는 표준정규 분포에 끝자락에 놓여있다는 짤막한 결론 아래 나는 어느정도 만족을 했어야했다. 그리고, 그 표준정규분포는 그렇게 분산이 크지 않았던 것 같다.





// 하도 글을 안 쓰다보니 이런 멍청한 글이나 쓰고 있다. 사실 과외돌이 질문 받다가 갑자기 떠오른 한 목사의 설교가 모티프가 되어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렇게 깔끔한 글은 아닌 듯 하다. 비유도 그렇게 좋지 못하고, 그리고 글의 완급이 그렇게 조절되지도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다.


// 이런 비유가 딱딱 맞아 떨어질 때 나는 만족하고 저장 버튼을 누르지만 요 근래 그런 일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그냥 버튼을 누르고 마저 할 일이나 더 하려고 한다. 뭐 닭이나 얼룩말과 다름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지만 뭐 어쩔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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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5. 24. 04:27 - Bengi

쓰지 않는 이유, 그리고 쓰는 이유

사실, 요즘 글을 잘 쓰지 않는다. 글을 쓸 생각이 없는 것도 한 몫하고 글을 보여줄 독자도 없는 것도 한 역활을 했었으며, 시간이 없다는 문제 또한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안 썼던 제일 중요한 이유는 내가 글을 쓸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아직 내놓지 못했기 떄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가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한 줌에 불과하다는 (매번 글 쓸떄마다 하는 소리지만) 것을 깨닫고 계속 공부해 나가는 과정 속에 있으며, 글을 쓰면서 레퍼런스의 부족이나 논리의 취약함을 매번 느끼며 글을 날려버리는 짓거리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사실 이런 선택은 그렇게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업적들은 "뿅"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 지속적인 연습과 수련을 통해 나오는 것이고, 글쓰기 또한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속적으로 글을 쓰고, 첨삭을 받고, 그리고 글을 고치고, 비판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글을 찟어 발기면서, 새로운 글을 써 나가는 일을 통해서야만 더 좋은 글이 탄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필력도 근육처럼 계속 연습하면 늘어나고,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줄어드는 거소가 같다. 그리고, 난 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이유야 앞서 말한 것과 같다지만, 사실 내가 글을 주로 쓰던 동기가 내가 더 이상 펜을 들지 않게 하는 원인이 된 것 같다.


많은 글들은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교화 시킬 목적으로 쓰여진다. 대표적으로 신문 기사나 인터넷에 돌아댕기는 짧은 글 조차도 어떤 정보를 던져주고,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데 주목을 한다. 사교나 친목의 목적으로 쓰여지는 글들은 SNS 상에서 자주 볼 수 있지만, 140자 정도의 틀에 갖힌 단어들의 나열은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니지도, 그렇게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는 건 확실한 것 같다. 트위터에서 벌어지는 키배만 봐도 허공에다가 칼질만 하는 것의 연속이라는 것을 보라! 문제는 나 같은 사람도 교화적 목적의 글을 써왔다는 것이고, 대부분 독자층이 정해져있거나, 혼잣말에 가까운 글들이라도 대부분 기승전결이 나름 갖춰진 전체적인 스토리가 있고 이를 통해 뭔가 이야기하려는 게 분명한 글들을 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글들이 어떤 좋은 결과를 내는지에 대한 확신을 세울 수 없게 됬다. 첫째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정확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나왔고, 둘째로 교차 검증을 통해 제대로 된 지식을 갖고 있음이 확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어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쓸 떄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셋째로 설사 어떤 주장을 펼치기 위해 지식에 기반한 적절한 근거를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주장이나 근거가 전체적으로 약화될 수 있는 반례가 있을 수 있는 가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뭐, 이렇게 복잡하게 글을 쓰고 앉아있냐라고 물어본다면, 보통 글로 뭔가를 하려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살 것이라는 걸 말을 해주고 싶고, 대부분 내가 무엇을 안다라고 하는 상황은 내가 아는 무언가를 완벽하게 반박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아니, 어떤 것을 아는데 그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는게 말이 되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으나, 어떤 사태에 대한 평가나 주장은 대부분 반례에 대한 반례와 반례에 대한 반례에 대한 반례와 반례에 대한.... 이런식으로 끊이 없는 기나긴 사슬 속에 놓여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보통, 반례에 대한 반례에 대한.... 아니 간단하게 말해서 8번 정도 내 의견과 상대방 의견이 엎어지는 경험이나 혼자서 반례에 대한 반례를 만들어내는 사고를 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 의견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음"을 선언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요즘 이런 선언들을 많이 하게 된다.


어떤 가치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가치들이 동원된다. 그리고, 아마도, 논쟁의 중심에 있는 것들은 동원된 다수의 가치들이 서로 상충되고 있을 때일 것이다. 절대적인 두 가치가 충돌을 하거나, 아니면 의심할 여지도 없는 무언가가 완벽하게 무시되거나 반박되고 있을 때는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런 것을 피하기 위해 범위를 좁히거나 ( eg. 평화 상태에서의 살인은 나쁘다. ->  전쟁 중에는 살인이 허용되므로 범주에서 제외 ) 모든 범위를 가르키지 않는 방식으로 (eg. "대게" 살인은 나쁘다. -> 전쟁에서 벌어지는 살인 행위에 대한 가치판단을 회피 )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요령을 점점 잘 배우게 된다면 거의 무적에 가까운 논리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런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가치들의 충돌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모든" 충돌 상황을 상정하고 비교하고, 가치들의 경중을 따져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한 번 해보자. 아마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개중에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가치가 갑자기 튀어나올 수도 있는 것이며, 가치에 대한 평가가 잘못되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글을 안 쓰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이것일 것이다. 나는 지금 내 지적 수준으로는 유의미한 글을 써낼 자신이 없으며, 제대로된 가치 판단을 이끌어낼 자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편협한 시선으로 전체를 바라보기 때문에, 전체적인 것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이 기나긴 글이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 그렇다면,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앉아있는 것인가? 이 글 조차도 그렇게 좋은 가치판단을 한 거 같지 않으며, 전제들이나 뒷받침하는 논증들은 그렇게 썩 좋아보이지 않는데! 아마,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이 정도면 "유의미한" 이야기를 이끌어 낼 수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했기 떄문이다. 사실, 2시간 전만해도 vim에 관한 자료들을 찾으면서 스터디를 빙자한 주입식 강의에 쓸 vim을 왜 써야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고, 그러다가 어떤 블로그에서 내가 아예 모르는 플러그인들을 찾아내면서 상당히 짜증이 많이 나 버렸다. "강의자라는 인간이 남들은 다 쓰고 있는 플러그인을 쓰지를 않고 있었다니!"라는 생각과 "이 상태라면 vim 이후에 가르치게 될 리눅스 전반적인 것은 또 어찌 해쳐나갈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번뜩 들게 되고 만 것이다. 그 블로그에 적힌 글들 하나하나를 읽으면서, 나는 왜 모르는데 왜 저 사람은 알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겸 그 사람의 과거로의 항해를 감행하였고, 결과적으로 한 꺠달음을 얻고 이 블로그에 이딴 글이나 쓰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컴퓨터 공학이라는 학문이 이런 저런 학문들을 얼기설기 섞어서 만든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며, 그 중에 "언어"라는 것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뭔가 "기계"에 종속되어 성능에 묶여있는 무언가를 보게 되었는데, 대부분 수학자나 물리학자나 아님 컴퓨터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컴퓨터 공학에 기여한 부분이 의외로 많다는 것과 대부분 컴퓨터가 쓰이는 현장에서 컴퓨터 공학/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설 수 있는 자리는 그렇게 넓지 않다는 것이였다. 이는, 아마도 컴퓨터라는 것이 증기 기관과 같이 인간의 노동력을 경감시키는데 동원된 무언가이며, 우편을 전자 메일이, 거대한 복식 부기 장부를 ERP가, 계산자를 윈도우 계산기가 대체를 하였다는 것만 봐도 컴퓨터 프로그래머에 대한 회의가 많이 든다. 대부분, 프로그래머들이 하는 일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대체"해 나가는 작업의 연속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기 보다는 기존에 있었던 것을 변형해서 새로운 형태로 만들되 기존의 목적을 버리지는 않는 방향으로 무언가를 계속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근원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앞서 말한 증기 기관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증기 기관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새로운 산업혁명을 부르고는 있지만, 돗단배를 증기선으로, 마차를 자동차로 바꾼 것이 증기 기관이 한 역활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증기 기관이 한 일의 전부였으리라. 증기 기관차가 등장하였고, 자동차와 증기선으로 인해서 활동 범위가 늘어났고, 대량 생산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였지만, 여하튼 그것은 증기 기관이 세상을 바꾼 것이기도, 증기 기관을 이용한 사람들이 바꾼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마도 증기 기관 기술자라는 명칭을 달고 나는 증기 기관을 잘 다룰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나, 증기 기관의 효율을 개선하는 일에 매진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기 기관을 통해 바꾼 사회"에 대한 이야기와는 약간 거리가 떨어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학문 공동체에서 배타적이고 자신들만이 쓰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우를 많이 봤다. 경제학이나, 물리학이나, 사회학이나, 이런 저런 학문들에서 자신들의 방법론을 제외한 다른 방법론을 배척을 하는 경향은 엄청나게 큰 편이다. 그리고 간혹 가다, 이런 이단적인 의견을 배척하는데 실패하면, 그 공동체는 와해되거나 완벽하게 사장되고, 새로운 공동체가 원래 있던 자리를 차지하는 일은 흔한 일이였다. 빈 학파나,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플로지스톤이라던지 이제는 비주류적인 주장이 되어버린 것들이 모두 그러할 것이다. 이는 학문 공동체만의 일이라고 할 수 없고, 인간 본연의 특징이라고 봐야될 것 같다.


사실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에 대해 계속 드는 생각은 과연 프로그래머가 된다는 것이 정말 의미 있는 일인가? 라는 것이다. 아니, 지금 프로그래머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행동 패턴은 과연 중장기적으로 프로그래밍이라는 행위와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유지 될 수 있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무언가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많은 글들을 보면서, 개발 방법론이라던지, 프로그램의 철학이라던지, 혹은 디자인 패턴, 그리고 외부의 사람들 (디자인, 경영, 그리고 다른 학문에 속한 사람들) 과의 소통 방식을 보면서 점점 느끼는 것은 도구에 너무 집착을 한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언어의 형태를 띈 수학적 요소가 가미가 된 뭔지 모르지만 영어로 서술이 되는 무언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쩄든 사실 요즘 느끼는 것들이 그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이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반박도, 더 긴 논의도 할 수 없다. 단순히 요즘 느껴지는 느낌만 간단하게 설명을 했을 뿐이다. 이러한 말을 덧붙임으로 책임회피를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고, 피드백도 받고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만 (사실 이 글을 볼 사람도 거의 없다는 것부터가 문제다) 아마도 여기서 글을 마쳐야할 거 같다. 새벽 4시 30분 쯤에 밤쯤 잠에 취해서 글을 더 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내 느낌을 또렷히 살려서 무언가를 쓸 수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내가 느끼고 있는 무엇 만큼은 적어야할 거 같아서 적는다. 무언가 분명히 잘 못된 느낌은 아직도 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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