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끄적끄적

2015.1.24 책, 활자 매체, 종말

몇 년, 아니 1년 전까지만해도 사람들이 잡지나 신문을 읽는 것을 잘 이해를 못했었다. 전문적인 잡지가 아닌 그냥저냥한 잡지들에 적힌 것들은 대부분 내가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서 길게는 몇 년, 짧게는 몇 주 전에 접했던 것들이고, 연예인 관련한 가십거리들은 뭐 내 관심 밖이었으니 별로 신경조차 쓰지 않았었다. 책은 분명히 좋은 지식의 원천이자 생각을 견고하게 해주는 촉매제였다. 300페이지 혹은 그 이상의 종이에 일관된 생각과 뒷받침 문장들을 쑤셔 넣고 그것을 단계적으로 정렬하는 것 만큼 힘들고 논리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읽고 책을 비판하거나 수용하는 과정 또한 상당히 복잡하고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다. 이런 시간 투자를 통해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고, 사고하는 방법이나 논리를 전개하는 방법 등을 자연스럽게 배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뭐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추천하고, 다독을 권장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아니 그 이전 유치원 때부터 책을 상당히 많이 읽어왔었다. 하루에 4시간 이상씩 책을 읽었고, 교양 서적부터 전문 서적까지 꽤 폭 넓게 읽었던 것은 나의 사고 확장에 큰 도움을 줬던 건 분명하다. 중학생 때 과학이나 경제/경영 쪽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정도 주절거릴 수 있었던 것도 대부분 이 시기 덕분이다. 이 덕분에 언어 공부를 하나도 안하고 언어 2등급을 맞을 수 있었던 것과 재수학원에서 뼈를 깍으면서 공부해서 언어 1등급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대부분 독서를 통해 얻은 결과였다고 자부할 수 있다.


여하튼, 학생의 신분, 아니 미성년자라는 신분을 지니고 있었을 때에는 텍스트 매체를 읽을 시간도 넉넉했고, 학교 수업이야 책 읽으면서 무시해도 대충 따라가던 시절이었으니 나는 시간이 없기에 독서를 못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 같은 경우만해도 너무 심심했기에 책을 읽었던 경우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나이를 어느정도 먹고, 이런 저런 생활을 하면서 점점 그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책 100권을 대출하면 100권을 대출했다는 (안 읽어도 된다!) 증빙서류를 떼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명문대라고 칭하는 대학이 이 꼬라지면 어찌하나라는 생각을 먼저했다. 우리는 뭘 위해 책을 빌리는가, 책을 빌리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책이란 것도 하나의 스펙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강렬히 받았다.


그리고, 난 책을 요즘 읽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내가 읽는 매체가 아예 달라졌다. 내가 읽는 것들은 대부분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이다. 활자 매체의 종말은 다가오지 않았지만, 인쇄 매체의 종말은 기정사실인 것 같다. 대부분의 글들을 인터넷으로 읽고, HWF와 PDF 파일이 드롭박스 폴더에 가득한 것을 보면 책은 죽어버린게 확실하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활자의 길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논문, 짧은 뉴스, 그리고 웹 사이트에 기재되는 글들은 아무리 길어도 5000자를 넘지를 못하는데, 이는 수 십 만자까지 채워져있는 책과는 분명 그 분량면에서 상대가 안된다. 결과적으로 빈약한 근거나 빈약한 뒷받침 문장을 기반으로 자신의 주장을 어필하거나, 하이퍼 텍스트의 덩어리들을 보게 되는데 이는 활자를 읽는 방식이 아주 크게 달라졌음을 이야기한다.


이런 문제들은, 대부분 책을 읽을 정도의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책을 읽을 능력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거에 기반하는 것 같다. 그리고, 정보를 접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웹이란 틀에 맞춰서 점점 변하는 것도 한 몫을 하고, 논문이라는 틀 -공대나 자연계통 쪽에서는 몇 페이지 내에 전체적 설명-실험 내용-결론-레퍼런스를 쑤셔넣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고 정보를 생으로 받아 가공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한 몫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논문들은 레퍼런스 (참조 문헌)이라는 하이퍼 텍스트 이전의 하이퍼 텍스트를 통해 엮여져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한다.


거디가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학점을 꽉꽉 채워서 듣고, 계절학기도 8학점씩이나 들으면서 몸을 축내고 살았는데, 이 과정에서 좀 많은 것들의 희생이 있었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취미는 제 1순위로 없어졌고, 그 다음으로 책을 보는 습관은 제 2순위로 없어지게 되었다. 140자의 텍스트를 보는 건 투입 시간 대비 효용이 좋기에 버리지를 못했지만, 여튼 길고긴 원서 전공 서적과 쪽당 4슬라이드에 40장에 달하는 ppt 덩어리와 씨름하며, 주입식인지 반-주입식인지, 생각을 물어보는건지, 아님 가르친걸 배끼는 걸 원하는지 모르는 것들을 학교 도서관에 쳐박혀서 공부하면서 시간의 부족함을 느꼈다.


나의 읽기 방식은 많이 바뀌었고, 그것에 순응하여 요즘 나는 잡지를 많이 읽는다. 3일 이면 600페이지에 달하는 하드커버 소설이나 사회 과학 책을 읽었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각종 대안 언론들이나 블로그 글들을 구글링과 트위터 피드백을 통해 읽거나 여러 정보들을 추합해서 사고하는 형태로 점점 바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불만이 많은 건 레퍼런스를 찾아도, 줄기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글들은 사람의 생각과 전제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전제나 생각은 유추가 가능하지만 완벽하게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논문에서는 학계의 주된 생각이나 함의들을 생략하고, 신문에서는 전체 독자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전제들을 생략하게 된다. 예를 들어, 논문들을 보면 열역학 법칙은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의를 건너 뛰거나,사용한 통계적 방식에 대한 설명을 건너 뛰는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사실 잡지 -정확히는 주간지와 월간지-와 신문, 논문, 블로그 글을 읽으면서 갖게 된 불만인 부분이기도 하다.


여튼, 요즘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나, 타임이나, 뭐 이코노미스트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나 이런 녀석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들은 "비한국적인 것들은 이런 것들을 어느정도 해결을 해 놓고 있구나."라는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읽으면서 월간지에 주석이 촘촘히 달려있다는 것에 놀라고, 그 주석이 중 많은 것들이 하이퍼링크라는 것에 놀랐다. 이렇게 글을 써놓고 보니 밀도 문제가 의외로 큰 거 같다. 책들은 두껍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과 각각의 사례를 다시 저자가 재 분석하는 과정이 있는데, 이 부분이 생략 됬거나 아니면 보평 타당한 (그들만의 (...)) 상식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부분들이야 책을 많이 읽게 되면면서 알게 되는데, 저자들이 어떤식으로 생각을 표현하고 은유를 쓰거나 아님 앞에 반복한 내용을 "어떤식으로 뒤에서 반복 안하는가"를 배운다면 이런 잡지나 짧은 글들이 내포하고 있는 원천적인 주장을 얻기란 의외로 쉬운 일이다. 그리고, 만약에 그 원천적 주장을 모른다고 해도, 검색이나 레퍼런스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유추가 가능한 정도는 글을 쓰는 사람의 수준에 의해 좌우가 되는데, 글의 밀도가 높고, 보편 타당한 법칙에 호소하기 보다는 어떤 사실들의 나열을 주로 했고, 이런 걸 통해 결론을 단계적으로 도출해낸다. 그리고, 한국의 월간지나 주간지가 갖는 특성인 인터뷰나 잠입 취재(...)나 엉기성기한 글쓰기 방법이 상당히 문제가 된다는 건 알 수 있을 것이다.


방학 때 목표가 주 2권씩 책 읽기인데, 이게 나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도 뭐 읽다보니 예술 관련한 글들은 아예 읽지를 못한다는 걸 깨닫고 나름 많이 멘붕중인데 이 또한 계속 배워야할 부분이라는 걸 느낀다. 살면 살 수록 읽고 배울게 많아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