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끄적끄적

스타트업 힙스터 생활 1주년

아, 사실 1주년이 되지는 않았다. 대충 11개월 하고 몇 일 정도 된 거 같은데, 11개월이나 12개월이나 그게 그거인 거 같고, 연애 기념일 챙기는 것도 아니고 날짜 하나하나 세서 챙겨줘야할 것도 아니고, 축하할 일도 더더욱 아닌 거 같아서 그냥 11개월에서 반올림해서 1주년이라 적어버렸다. 뭐, 그리고 11개월이나 12개월이나 이미 배울 건 다 배우고, 느낄 건 다 느꼈으니 뭐 글의 내용도 바뀌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기도 하고.


원체 별 생각 없이 시작한게 스타트업이었고, 장기적으로 해보면서 느끼는게, 그냥 열정적으로 뭘 할 시간에 내 커리어나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 딴 걸 하던지, 대학원이나 다니던지, 아님 그냥 제대로 된 기업에서 일을 하는게 오히려 낫지 않나 싶다는 생각을 매 시간, 매 분, 매 초마다 해왔던 것이다. 스타트업이라는 미명아래 용서 받을 수 없는 것들에 면죄부를 주는 것들을 보면서, 스타트업은 일종의 사이비 종교가 아닌가 싶은 의심이 점점 짙어진다. 사이비 종교에서 제공하는 단체 합숙, 공동 생활, 개인 자유의 부재, 강제 되지는 않지만 강제성이 충분한 십일조, 노예 노동, 매 주 마다 있는 회개 시간과 고해성사, 점점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신도들, 말빨 괜찮은 교주님, 그리고 구원 받으리라는 믿음을 보라.  그 믿음 아래,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새 절망의 구렁텅이로 서서히 빠져든다.


미담이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스타트업 보육원에서 대충 매트 (라꾸라꾸면 돈 있는 회사다ㅋ) 깔아 놓고, 겨울에는 전열기 3~4개가 윙윙 돌아가면서 냉기를 간신히 몰아내고, 여름에는 선풍기가 뜨듯한 공기를 순환시키는 곳에서 잠을 청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와 라면이 반겨주고, 점심은 대충 어디서 시켜 먹던지 한솥 도시락을 먹고, 저녁은 짜장면이나 시켜먹는 생활이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성공해 있다!"라는 스토리가 여기저기 올라오고, "청춘이니까 아프다." (정작 아파 죽은 청춘은 생각도 안하지) 라는 말을 하면서, 대한민국 붉은 네온싸인 십자가가 이곳 저곳 박히 듯이 스타트업 보육 센터들이 생기고 있다. 법인 등록 비용은 대충 창조경제혁신 센터의 도움을 받아 받고, 돈을 쪼개서 각자 1~20만원 씩 법인 통장에 입금을 하고, 지분을 나눠 갖는 것으로부터 신성한 스타트업이 시작된다. 사실, 그 전에 BM이라던지, 아이디어라던지, 프로토타입 정도는 나와있어야겠지만, 요즘은 MVP 모델에 의거해 일단 부딛혀보고, 점점 수정하면 어떻게든 성공하리라는 믿음이 만연해있다.


이렇게 해서 성공한 기업은 별로 없다. 대부분, 월급을 제대로 줄 수 없으니 제대로 된 개발자를 구하지도 못하고, 운이 좋아서 지분 주고 무급으로 사람을 돌린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지쳐서 떠나는 건 기본이다. 거기다 회사 자본이 떨어지면, 돈을 C레벨 (이라고 해봤자, 지분 조금 쥐고 무급으로 열심히 노동을 하는) 임직원들에게 조금씩 모아 증자를 하건, 투자를 하건, 뭘 하건 간에 회사가 다시 돌아가도록 만든다. 사실 이런 지경에 오면, 어느 순간부터 일정 관리라는 이름 아래, 매주 고해성사를 시키기 시작하는데, 사실 자발적인 것도 아니고, 내가 널 신뢰를 못하겠으니 너의 모든 일정을 나에게 보고하라는 식의 연장선상일 뿐이다. 거기다 분명 데드라인은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계산을 해서 나온 거 같은데, 잠 잘 시간을 고려해야한다는 걸 잊어먹은 듯하다. 그래도, 제품이 나오면, 투자를 받고, 월급도 받고, 스톡 옵션도 열심히 지르고, 지분이 이제 장외에서 주 당 20만원에 거래가 될거라는 헛된 희망 속에 오늘도 일을 하지 않는가 싶다.


이게, 미담이랍시고 나오는 대부분의 스타트업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아니, 뭐 투자 받은데는 제대로 된 사무실도 갖고 있을 거고, 식대도 있을 것이고, 스톡 옵션도 제대로 줄 것이며, 정시 퇴근을 할 것이며, 매주 회의 시간에 있는  "회개의 시간" 대신 제대로 된 일정 관리 툴이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 기업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있던가. 그리고, 그런 기업들은 이미 회계 장부를 까보면 흑자를 내고 있고, 기업 운영이 어떻게 되나 들여다보면 제품 개발보다는 유지 보수나, 차기작 개발에 매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게 내가 다니는 스타트업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아 그래, 솔직히 말하자, 그런 스타트업이 절대 아니였으면 좋겠다. 일정 관리 안되고, 투자 제대로 못 받고, 식비 내가 직접 계산하고, 그리고 지분 받고 일하는 건 부정을 못하겠다만, 음... 그래 옆에 2개월 만에 공중 분해된 저 팀보다는 괜찮지. 3개월 만에 방 뺸 저쪽 보다는 괜찮지. BM도 없는 저기보다는 미래가 있겠지... 음... 생각해보니 우리는 BM 있던가?


회사가 제품을 생산하려면 돈이 필요한다, 돌을 빌려주겠다는 사람도,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도, 지분을 사겠다는 사람도 모두 다 제품이 생산이 될 때 보자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스타트업을 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사무실에서 잠 자고, 월화수목금금금 밤을 새고, 일정에 쫒겨 사는 것도 이해가 될 수도 있다. 근데, 이런 행위들의 보상은 정말 올 것인가?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로 나올 것인가? 대부분 그렇지 못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BM이건, 소비자 반응이건, 실 제품이건, 대부분 공상으로 끝난다. 초기에 자본금 들고 들어가던지, 회사에서 일하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일을 시작하지 않은 이상,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시작선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팀이 우리 뿐인줄 알았는데, 주변에서 열 댓 팀이 대부분 비슷한 경로를 거쳐 비슷하게 망하게 되는 것도 재미있다. 적당한 아이디어로 심사 통과 후 보육원 입주, 개발자 구인 실패 (혹은 구인 했으나 개발자 혼자서 개발을 다 함), 실제 시장 조사를 안하거나 소비자의 반응이 예상한 것과 다르게 나옴, 결과적으로 제품 개발에 차질이 생김, 투자를 받아야하는데 매번 2차나 최종에서 떨어뜨려버리는 지원 사업과 VC, 이런 것들을 겪다보면 사실 그 누구라도 지치지 않을 수가 없다. 뭐 제일 잘못한 건 성공하지도 못 할 한심한 아이디어로 창업 보육 센터에 들어간 CEO가 책임을 져야겠지만, 그것을 승인해주고, 투자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해주고, 좋은 아이디어라고 박수쳐준 주변 사람들의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냥 CEO가 무능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 했을 것이다. 적당히 유능해서, 이렇게 된 것이지.


스타트업은 힙스터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