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글을 쓸 때, 손 끝에 느껴지는 감각은 연필의 흑연이 부스러지는 느낌도, 볼펜의 볼이 굴러가는 느낌도, 만년필의 촉이 사각거리는 느낌도 아니다. 무미건조한, 타닥거림 속에서 노트북 액정에 글자들을 나타내게하는 자판의, 정확히 말하면 스프링의 장력과 PCB 키보드의 감촉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글이란 퇴고의 과정 없이 술술 쓰는 생각의 정수라 생각을 하였지만, 요 근래 도통 생각이란 걸 해본적이 없으니 정수를 쏟아낼 일도 없을 뿐더러, 화면 속의 글자들을 자꾸 지워나가고 다시 쓰고 그리고 다음에 어떤 단어를 놓을지에 대해 계속 고심하는 퍼즐 맞추기에 가까우리라. 잘못된 피스 하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 모가 나가는 일들을 반복하다보면, 거기서 거기로 보이는 단어들이 왜 글을 쓸 때에는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해보지만, 어쩌랴, 다시 다른 조각을 그 위치에 맞추려고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을. 이런 식으로 수 백 개의 조각들을 맞추어 간신히 만들어낸 한 편의 글은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다. 아마, 300 피스 퍼즐이 2000 피스 퍼즐보다 웅장함도, 아름다움도, 성취감도 덜 하리라는 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주어진 그림을 다시 맞추어나가는 고된 일을 하면서, 예전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회상하기는 커녕, 기억의 편린들이 점점 증오스러워져가는 걸 겪게된다. 그런 기억들이 한 때 지식을 살찌워갔던 것이라면, 이제는 버려야할 것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수사의 규칙이라던지, 우아한 단어의 선택이라던지, 시의적절한 주제의 배치라던지, 거슬림 없는 흐름이라던지 이런 것들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것들은 불필요한 것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언어의 다채로움은 축소되고, 단순한 논리 관계에 속박되어버린, 칙칙하고, 어둡고, 그리고 성냥곽처럼 작은 실용적인 무언가를 쫒기만 하는 것이다. 단순함이여, 그것이 설령 미를, 유창함을 빼앗을지라도, 나는 그것의 드라이함에 매료되어 그것을 추구하리라. 자판 위에 놀아나는 손가락의 경쾌한 리듬을 줄이고, 최소한의 소리만으로 글을 완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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